이야기는 먼저 장소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그저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전시를 다루는 글에는 언제나 정해진 장소가 있다. 그래서 남는 일은, 더 작은 장소의 이름, 그림에 관하여 말하는 일이다.
그림은 소리가 없지만, 사람들은 듣기를 바란다. 말을 바라고, 질문을 기대하고, 염려를 원한다. 적어도 이를 향한 믿음은 존재한다. 김하나의 개인전 《지리산》은 그런 기대에 어긋난 답을 내놓는 것과 비슷하다. 열다섯 점의 신작은 그림이 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하는 대신, 그림이 할 수 있는 곤경을 보인다.
김하나는 회화에 부과되는 생산적 요구, 전시와 정합하는 설명, 기획, 실천에 반하여, 알맞은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내려놓는다. 전시는 '전시를 준비할 능력을 잃어버린' 그림들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할 수 없는 일은 말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은 소리가 되는 일과 비슷하다. 그림은 '동일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같음', 비슷함의 이 헐거운 정의 안에서 한편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김하나는 그늘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늘에 관해 알아야 할 것도, 딱히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느슨한 결론에 이른다. 밤이 오면 사방이 깜깜해지는 산속에는 도심에선 볼 수 없는 비슷한 곤경이 깔린다: 음성 없는 소리 그리고 그림자 없는 그늘이다.
그림자는 명암을 드러내는 은유이다. 은유는 형이상학에 속하고, 그래서 그림자는 모든 경우 진지한 질문으로 기능한다. 언어를 담는다는 점에서, 그림은 그림자와 동일하다. 예컨대 에드 루샤(Ed Ruscha)는 그림, 그림자, 언어를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렸다. 작은 것들이, 그림과 그림자를 갖는 언어의 아래서, 도로 거대한 질문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듯. 루샤는 파리, 올리브, 커피콩, 물방울 그리고 짧은 단어를 그린다. 회화에 대한 탁월하고,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블랙 유머. 이후로 나는 그런 단순함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빛과 어둠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림도 비슷하게, 또 뒤를 잇는 진지한 질문도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그들은 빛과 어둠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이상한 예감마저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어가 된다.[1] 이제 회화에는 복잡하고 정교한 어젠다가 폭발적으로 번영한다.
매체에 관한 많고 다양한 걱정이 동시대 회화를 지탱하고 있음에도, 언어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는 김하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지난 개인전의 이름 ******.*.***..***처럼, 김하나는 현대적이라 말할 수 있을 태도와 무관하게, 고요함과도 무관하게, 명시적인 언어를 비운다. 그림에는 조화로운 수사, 효용 있는 침묵이 아닌 핑계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남는다. < 무제 5 >는 박스 위에서 낮잠을 잔 뒤 그려졌다. < 무제 6 >은 유광의 화이트보드가 반짝이기에 그려졌다. < 무제 9 >는 합판의 테두리가 우연히 마음에 들게 칠해졌기 때문에 그려졌고…. 그런 식이다. 처음에는 이따금, 의식하고서는 소리는 끝내 그치지 않는다.[2] 자급적인 모티프는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과분한 동기를 거절하는 적절한 대답이다. DJ라는 직업이 그렇듯: 선별은 개인적이고, 연결은 자의적이라는 점을 발표하는 일. 이는 무기력하지만, 흥미롭게 현대적이다.
서서히, 김하나의 그림에는 '그리기'의 흔적이 사라진다. 정면에는 그려졌다고 말할 수 없는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것이 있다. 마치 손에 의해 그려진 것 같지 않다. 그나마 옆면에 적은 양의 그림이 묻어있다. 단순함을 쉬운 비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리기는 구성적 형식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다. (악보를 보지 않고) "귀로 연주한다."라는 표현처럼, 김하나는 창작의 기법과 의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말하자면, 어딘가에 자신을 던져놓고, 그곳에 머물며 구원이나 … 아이디어 따위를 찾지 않는다.[3] 딱히 그리지 않는 일은 꽤나 직업적이고, 점차 커지는 창조적인 무던함을 필요로 한다. 이를 증명하듯, 그림은 별로 상상한 적 없던 회색 계열의 줄무늬로 전면을 채운다.
아직 음성이 없는 그림을 위한 낱말은 없다. 회화는 음성을 획득했고, 정합적으로 말한다. 적어도 이를 향한 믿음은 존재한다. 음성이 등장한 이후, 뒤늦게 '무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한 가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성은 침묵이 아닌, '동기화되지 않음'을 앞에 수식한다. 무성영화와 (유성) 영화의 명칭은 소리의 유무가 아닌, 화면과 소리의 결합 여부에 달린다.
과거 극장의 스크린 옆으로는 악기가 놓여있었고, 조용한 화면에 맞춰 실시간으로 연주됐다. 감정의 깊이를 추가한다는 명목으로, 실은 유령과 같은 영사기의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다. 무성영화는 시끄러웠다. 이 점은 무성영화를 설익은 유성영화가 아닌 고유한 장르로 만든다. 극장은 활력으로 가득 찬 생기 없는 미소, 웃음소리 없이 수축하는 안면근육,[4] 그리고 그 위에 덧대지는 형식화된 허구의 소리로 가득했다.
무성화. 맞지 않는 소리가 들리는 그림이 있다면, 전시의 그림은 가뿐히 범주 안에 포함된다. 마치 실패한 (유성) 그림을 비평하듯, 생명 없는 형체와 의중 없는 형식. 둘을 전문적인 수준으로 비동기화 하거나 (치밀하게 어긋나게 하거나), 혹은 실망스럽게 동기화하거나 (실패하게끔 합치거나). 무엇을 하던 결과는 정합하는 미소가 아니고, 유령 같은 침묵도 아니다. 실상은 단순하다. 일어나는 일은 고요함의 반대, 즉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5] 무성은 감쇠한 형체 위로 엉뚱한 신의를 마음대로 덧대는 일, 이때 그림은 되고 싶었던 모습의 잔영만 남은 사각형이 된다. 이는 회화가 이루고자 하는 낭만적인 바람—표현의 열망에서 쉽게 탈락한다. 무성은 회화의 오래된 두 가지 범주를 고루 낭비한다. 형사(形似), 사의(寫意)다.
동양화에서 형사는 대상의 외형을 재현하는 것이고, 사의는 내면의 생각이나 의중을 표현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구상과 추상의 분류와 유사한 듯 보이지만, 둘은 대립하기보다 서로 보완한다. 이상적인 그림은 형사와 사의를 두루 갖춘다. 요점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동시에 실패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김하나는 형사와 사의의 가장 단순한 의미만을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비슷한 형체, 그리고 그림 따위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다.
빙하, 바다, 그리고 말과 안장처럼 비교적 안정된 참조물이 정돈되어 등장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 전시에는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듯 보이는’ 참조물이 산재한다. 북케이스, 문손잡이, 가까운 인물, 아이에게 그려준 수영장—말하자면, 올리브와 파리 같은 것들. 모티프라 부르기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임의적이라 단정 짓기엔 섬세한 연속성을 가진다. 보통은 이를 취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비슷한 형체로 재배열된 (넓은 의미의) 이미지만이 취향의 정의에 부합한다. 형체는 계속해서 떠나가지만, 절대로, 완전하게 떠나가지는 못한다.
김하나는 과거에 사용했던 다양한 실천을 통하여 이미지의 형식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림에 일어나는 일은 선형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형식은 이상한 마음에 이끌리듯, 분해되고 뒤 섞인다. 모든 이름이 사라져, 알 수 없는 형식이 되어버린 마음이 화면에 남을 때, 그림은 마무리된다. 가령, 직접 자른 스캘럽 엣지, 베개 모양으로 접힌 여러 겹의 담요, 잘린 호두나무 각재 네 조각, 전시의 이름 지리산, 옅은 회색이 감도는 넓은 목재 구조, 하얀색 점으로 가려진 글씨를 볼 수 있다. 눈을 거스르지 않는 정직한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실제로, 마음은 은유가 아니다.[6]
취향과 충실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을 설명할 기본 시스템을 찾는 일은 헛수고일 것이다. 대신,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김하나에게서 관찰할 수 있었던 두 개의 상반된 신성: 단순함과 이상함[7]이 형체와 마음을 서로 상호 융해하는 곤란한 과정, 혹은 그것이 발생하는 비슷한 곳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늘은 볕을 등지고, 그림자들은 안에서 사라진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결과는 비슷하다. 과거의 그림 < 무제(작은 기념품 연작) >(2018)은 문으로 기능하지 않지만, 문 옆에, 문의 크기로, 문처럼 놓여있다. 틀린 해석일 수 있지만, 나는 아직도 캔버스 가운데 하얀 붓질을 문의 손잡이로 바라본다. 물론 "빗나갈 수 있거나, 빗나가야만 한다."를 눈치채는 것, 모든 방어가 추락하는 바깥의 유약함과 궁핍함[8]에 안도하는 것, 이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그림은 회화를 등지고, 문으로 가득 찬, 혹은 정반대일 수도 있는 사각형이다.
모두 그늘을 알고, 그곳이 장소라는 것을 안다. 김하나의 그림을 바라볼 때, 다시금 이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되며, 그곳에, 그림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내 생각에도 그것은 그곳이 아닌 곳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그런 일이다. 결국, 모든 것을 풍경으로 바라보는 것이 적합한지에 관한 생각에 이르고, 김하나의 그림을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풍경화로 분류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관한 생각에 이른다.
이동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