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장의 캔버스가 바닥에 놓여있다. 그림이 그려져 있기에 회화라 불려야 할 이것들을 온전히 감상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것들을 손으로 집어 들어야 한다. 낱장의 캔버스천 조각을 잡고, 옮기고, 붙이고, 놓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회화를 접고 구기고 말아야 하며, 조금은 문대고 긁어야만 한다. 괜찮다. 회화도 사실은 사물이기 때문이다. 회화 역시 사물이고 물건이고 대상이며, 《네 장》은 그러한 사실로부터 시작된 네 장의 천 조각 혹은 네 점의 회화에 대한 전시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림의 가슴〉에는 그림의 가슴이 그려져 있다. 사물이고 물건이듯 몸일 것이며, 하여 가슴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의 팬티〉처럼 팬티도 입어야 한다. 박다솜이 상상하는 그림의 몸이란 우리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뼈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지지체―뼈대로부터 이미 형태가 잡혀 있기에 이미지―살은 그저 따르는 것이다. 붓질이란 그런 것임을 네 장의 그림들이 보여준다. 벽에 걸린 천의 주름을 따라 붓이 가고, 붓자국을 따라 잘려지며, 다시 그 잘려진 형태와 붓질에 맞춰 이미지가 발생한다. 뼈와 살을 따라 (초록색) 피가 흐르는 내장을 갖추고 태어난 〈잘린 그림〉이 그 증명이다. 그리하여 물질적을 넘어 신체적이며, 신체적을 너머 시간적이다.
즉 박다솜의 작업에서 회화는 더 이상 벽에 고정된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손으로 만져질 수 있고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유연한 몸으로써 경험된다. 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러하듯, 박다솜의 회화를 만지고 바라보며 우리는 그 유한함에 대해 숙고해야만 한다. 회화가 탄생하고 변화하며 소멸할 것이라는 상상의 끝에서 그 어떤 우주적 사건을 조우할지도 모를 일이다.